공부가 급한데 무슨 독서? 잘못된 이분법입니다
수년간 여러 학생들을 지도한 K 멘토는 독특한(?) 멘토링 경험으로 유명합니다. 물론 여러 해에 걸쳐 멘토링을 해왔기에 통상적인 교과 공부법도 오랜 기간 가르쳐 왔지만, 유독 범상치 않은 학생들이 K 멘토를 찾곤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학생인 경우도 있지만, K 멘토의 심상치 않은(?) 멘토링을 거쳐 범상치 않은 학생으로 거듭나는 사례도 많습니다. 그중 오늘은 두 학생의 사례를 말씀해드릴 텐데요, 각각 A군, B군이라 불러보겠습니다.
A군은 이과 진학을 지망하는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학교 시험 성적은 제법 상위권이 나왔고, 특히 수학 선행학습이 많이 되어 있는 학생이었죠. 중2임에도 불구하고 수1 영역도 모두 훑어본 뒤 문제들을 쭉 풀어봤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과학 공부도 선행이 되어 있었고요. 그런데, 굳이 A군이 “제법 상위권”이라고 쓴 이유가 있습니다. 여태 A군이 공부한 것이 무색하게도, 분명 최상위권 등수가 나와야 하는 상황인데 항상 시험에서는 삐끗하는 모습을 보였거든요.
물론 선행을 많이 한 학생들이 정작 선행 학습이라는 명목 하에 멍하니 수업만 들었을 뿐 그 내용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제 학년의 공부도 허점투성이인 경우가 허다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A군이 그래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K 멘토가 보기에도 그렇고, K 멘토가 물어본 A군의 타 과목 담당 멘토들도 A군이 멘토들 앞에서는 곧잘 설명도 하고 문제도 막힘없이 푼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때, K 멘토가 주목한 A군의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시험 때 졸았어요.”
어떻게 수업도 아닌 시험 때 졸 수가 있냐고, 성적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아 핑계를 대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K 멘토도 처음에는 핑계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오랜 시간 A군을 관찰해 보니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멘토들이 문제를 하나씩 풀어보게 할 때는 A군에게 특별히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그 실력은 채 1시간도 가지 않는 집중력 탓에 시험장에서 발휘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K 멘토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방학 중 일주일에 하루씩은, 다른 공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 쉬는 시간 없이 최소 3시간씩 책을 읽자고 한 것입니다. 그것도 학생 홀로 알아서 책을 읽으라고 했다가는 집중했는지 알 수가 없으니, K 멘토 본인과 함께 강독식으로 책을 한 권 떼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A군의 진로희망을 고려해 K 멘토가 선정한 책은 파이어아벤트의 『방법에 반대한다』였습니다.
『방법에 반대한다』는 독특한 책입니다. 이미 과학철학 논의에서 고전의 반열에 들어선 저작인 동시에, 여전히 논쟁적인 주장을 담고 있는 문제적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파이어아벤트는 과학과 지식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과학의 발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하여 기존 과학철학자들의 주장과 여러 통념 전반을 논박합니다.
중학생이 읽기에는 어렵지 않냐고요? 물론 어떤 중학생이냐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마는, 어렵다면 어려운데 용어나 개념이 어렵기 때문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주장이 다양한 역사적 사례와 함께 등장하는 가운데, 저자는 각 주장을 분석한 뒤 각 요소를 승인하거나 반박하며 자신의 논지를 세우고, 때로는 스스로 제기한 논지를 재반박하고 또 종합합니다. 이렇듯 복잡하게 진행되는 본문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 줄 한 줄 집중하며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A군과 K 멘토가 『방법에 반대한다』를 읽기 시작했을 때, 3시간 이상을 꼬박 할애했어도 서너 쪽을 겨우 읽고는 했습니다. 본문을 생각 없이 눈으로 훑고 넘어가는 대신 본문의 구조를 더듬으며 저자가 이 이야기를 여기에서 왜 하는지, 각각의 대목은 서로 어떤 관계로 연결되는지 A군이 확실히 이해했음이 확인되었을 때만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A군도, A군의 부모님도 반신반의했지만, 이러한 연습이 A군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K 멘토는 반복적으로 설파했습니다.
이후 A군에게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굉장히 오랜 시간 공부를 하면서도 집중력을 잃거나 피로를 느끼는 빈도가 줄었을 뿐 아니라, 문제를 풀 때 실수로 틀리는 경우가 확연히 감소했습니다. 게다가 몰라서 틀렸다고 한들 자신이 어떤 지점에서 무엇을 몰라서 문제를 틀렸는지 정확히 알아차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재미있는 것 한 가지를 추가로 말씀드리자면, A군의 수학 성적은 눈에 띄게 도약했습니다. 방학 중 수학 공부도 병행한 덕분도 당연히 있겠습니다만, K 멘토를 비롯한 멘토들은 방학 동안 A군이 끈질기게 지겹고 어려운 책을 읽었기 때문에 수학 성적도 오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철학서를 읽으면 수학 성적이 오를 수 있다니, 문득 듣기에는 직접적인 상관 관계가 없는 별도의 사안인 것 같지만 독서는 분명 공부 전반의 기반을 닦아줍니다.
한편 B군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예비 고1이었습니다. 영어 학원을 계속 다녔고, 멘토들의 테스트 결과 어휘 수준과 문장 해석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으나 문법 실력은 고등학교에서 별도로 더 공부를 할 필요가 없어 보였습니다. (여담이지만, 중학교 공부만 착실히 하더라도 영문법은 고등학교 진학 후 새로 배울 것이 거의 없습니다.) 고등학교 영어 모의고사 문제를 풀어도 어느 정도 성적이 잘 나왔습니다.
B군도 A군과 마찬가지로 이과 학생이었는데, 고등학교에서는 수학과 과학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마지막 방학 동안 영어 실력을 완벽하게 다지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달리 말해 모의고사 및 수능에서 영어는 무조건 만점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지요.
B군의 영어 공부법 멘토링도 K 멘토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중3인데 고교 모의고사를 풀었을 때 영어는 불안하게 90점 아래위로 점수가 오가고, 이것이 심리적으로도 부담이 되니 영어는 무조건 만점을 받을 수 있게 되면 좋겠는데, 다만 고교 진학 이후 영어 공부를 별도로 하고 싶지는 않다는 B군의 말을 K 멘토는 담담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사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딱 잘라 솔루션을 제시하기 어려운, 까다로운 요청이었습니다. K 멘토는 차분하고 나직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무조건 100점을 받고 싶다면, 100점 이상의 실력을 갖추면 됩니다.”
K 멘토는 단어장과 고교 실전 모의고사 문제집을 지정해 B군 스스로 공부하도록 하되 매주 학습 상황을 점검했습니다. 단, K 멘토는 자신이 말했던 바와 같이 이것만으로 B군의 영어 공부 계획을 끝내지 않고 수능 수준의 영어를 뛰어넘는 실력을 B군이 갖추도록 의도했습니다. 그리하여 방학 동안 B군이 읽을 책을 한 권 지정해 주었는데, 바로 Kate Crawford 저 『Atlas of AI』였습니다.
K 멘토가 술회하는바, B군에게 『Atlas of AI』를 읽도록 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B군은 모르는 단어가 없다는 전제 하에 고교 영어 모의고사에 등장하는 문장들은 웬만큼 해석할 수 있었는데, 다만 중학교를 다니며 모의고사 지문 정도의 길이가 되는 글을 영어로 읽어본 경험이 상당히 부족했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한 대목이 못해도 수 페이지에 걸쳐서 이어지는 책을 영어로 읽어보게 함으로써 모의고사 지문 정도는 짤막한 글로 느껴지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 어휘가 부족한 것과 관련해 때로는 수능 영어 수준 이상의 어휘들도 자주 등장하는 글을 접해보며 어휘량을 늘리는 동시에, 모르는 단어들이 있다 하더라도 맥락을 통해 그 뜻을 유추하는 연습을 하며 자신감을 길러주어야 했습니다. 끝으로 B군은 AI 개발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향후 고등학교에서 학생부 종합 전형을 준비하며 세특 사항 등을 원활히 작성할 수 있도록 자신의 진로와 관련하여 사고를 확장하도록 하는 것도 목표였습니다.
방학 내내 K 멘토는 B군이 책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B군이 파악한 대로의 본문 내용은 무엇인지, B군은 그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꾸준히 물어보며 B군을 지도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B군의 영어 실력은 확연히 늘었습니다. 교양 있는 영어 원어민 성인을 대상 독자로 하는 원서를 꾸준히 읽었으니 실력이 성장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 영어 실력이 는 것과 별개로, 처음 보기에 아무리 어려운 지문이 나온다고 한들 차분히 읽어나간다면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얼마든지 이해하고 하단의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K 멘토의 멘토링은 B군 자신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성과마저 B군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비록 B군은 AI 개발에 관심이 있었지만 해당 진로에 관해 굉장히 협소한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B군은 『Atlas of AI』를 읽음으로써, 사실 AI 개발은 지리, 정치, 문화와도 굉장히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이후 B군은 K 멘토에게 영어 실력과 별개로 자신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며 감사를 표했습니다.
사실 많은 학부모분들은 자녀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에 아연해 하시곤 합니다. 뜻은 좋다고 한들, 당장 해야 하는 공부가 급한데 그런 팔자 좋은(?) 소리가 먹히겠냐는 말씀을 속으로 삭이면서 말이죠. 하지만 K 멘토는 이렇게 말합니다.
“공부 때문에 독서에 쓸 시간이 없다는 것은, 갈 길이 급하니 주유는 안 하겠다는 소리와 비슷합니다.”
K 멘토는 이어서 덧붙였습니다. 책을 읽는 일은 눈앞의 공부, 성적뿐 아니라 이후 학생의 삶 전체를 좌우하며, 책을 읽는 학생은 결국에 무엇이든 잘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K 멘토가 지도하며 책 읽기를 강조했던 학생들 가운데 현재 대학에 재학 중인 일부는 이미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