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시간'과 '양'만이 능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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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모든 일에는 양(quantity)과 질(quality)이 존재한다. 높이, 길이, 넓이, 무게, 속도, 온도 등은 모두 양을 측정하는 척도이다. 말하자면, 숫자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척도는 대부분 양의 척도이다.
이런 양의 척도는 공통적으로,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엄청나게 큰 빌딩?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다. 엄청나게 빠른 비행기? 그 숫자만 보고도 속도를 짐작할 수 있다. 엄청나게 무거운 아령? 들어올리려고 시도만 해 봐도 그 무게를 알 수 있다. 즉각적으로,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기준이 곧 객관적인 기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탓에, 사람들은 쉽게 한 가지 오류에 빠지고 만다. 바로 모든 것이 양적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소위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하는 것이다. 당신이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면 그들은 제일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묻지 않 는다. 그들은 "그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앤 무슨 놀이를 제일 좋아하지? 나비를 수집하니?"하고 묻는 법이 절대로 없다."나이는 몇살이지? 형제는 몇이고? 몸무게는? 아버지 수입은 얼마지?"하고 물어대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그 친구를 안다고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 제라늄 화분이 놓여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멋진 붉은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를 상상해내지 못한다. 어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 라고 해야한다. 그래야 "야, 참 멋 진 집이겠구나!"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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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中
이렇듯 사람들은 이른바 어른이 되어가면서, 많은 사안들에 대해 오로지 양적 잣대로 가치판단을 내리고는 한다. 그리고는 많은 사안들에 대해, 그것을 공업적인 잣대로 판단하거나 공업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가령 영화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운운하는 것은 그 영화가 천만 영화냐 몇백만 영화냐 하는 것이다. ‘국내 박스오피스 1위!’ 같은 문구는, 영화라는 예술 장르가 그만큼 공업화 되었다는 사실의 방증이기도 하다.
문제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공업적 기준, 양적 기준으로 설명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에는 단순히 크고 작음/길고 짧음/가늘고 굵음/얇고 두꺼움 등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누적 관객수 1,030만으로, 2014년 “명량”의 관객 수와 비교하면 약 700만명 뒤처진다. 그렇다고 해서 “기생충”이 “명량”에 비해 60%만큼 덜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많은 멘토들이 강조하듯, 공부에 투입되는 절대적인 시간과 같은 공부의 ‘양’은 공부를 잘하는 데 있어서의 결정적인 변수이다. 그러나 과연 그게 전부인가? 공부의 양 만큼이나 강조되어야 할 것은 공부의 질(quality)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한두명만 강조하는 게 아닌, 수많은 멘토 선생님들이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참고
양희문 멘토가 말하는 ‘단계별 공부법’ : http://mentor.or.kr/board_tHBb60/12228
이주영 멘토가 말하는 ‘양질의 공부’ : http://mentor.or.kr/board_KzBv29/11668
윤나영 멘토의 ‘수학 심화 공부법’ : http://mentor.or.kr/board_tHBb60/11575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학생들, 부모님들, 심지어는 선생님들까지도, 아이가 ‘얼마만큼’ 공부했는지 평가하는 척도로 몇 시간을 앉아서 공부했는지,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몇 회독을 했는지 정도만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아무리 긴 시간동안 공부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저질의 공부였다면 사실상 시간 낭비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물음에 도달하게 된다. 학습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가? 도대체 어떻게 아이로 하여금 양질의 공부를 할 수 있게끔 할 것인가? 새삼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 정형화되고 공업화된 방식은 없다. 이는 속시원한 답은 아닐지언정, 분명 사실이다. 비단 공부뿐만이 아니다. 소위 질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정형화된 방법론 같은 것이 있었더라면, 도대체 대학 같은 교육기관은 필요없었을 것이다. 무엇무엇에 대한 연구와 고민이 이처럼 활발하게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부의 질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이처럼 김빠지는 결론만이 나온다고 한다면, 도대체 공부의 질적인 측면을 고양시키려는 시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차피 정형화된 방법 같은 게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양질의 공부를 할 수 있게끔 지도할 수 있겠는가? 정형화되고 공업화된 방식이 없다뿐이지, 전적으로 인간의 질적 변화 가능성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대할만 하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단정적으로 말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소위 ‘교육’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과 다름 없다.
핵심은, 공부란 투입-산출의 함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10시간 공부한다고 해서 10시간치 성적이 바로 나오는 게 아니다. 어쩌면 100시간, 1000시간을 공부했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을 앉아서 노트나 끄적거리면서 헛되이 보냈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다. 하물며, 그 ‘결과’라는 것도 단순히 성적을 말할 것인지, 내지는 전보다 지적으로 성숙한 자기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술적으로 능숙해졌다는 것인지, 그 의미가 다층적이다.
따라서, 자주 강조했듯이 학습 퀄리티의 향상은 환경을 섬세하게 조성하고, 학생의 상황에 맞추어 유기적으로 반응하며 학생 스스로 개화하게끔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참고- 자기주도학습에 대한 부모님들의 오해:http://mentor.or.kr/index.php?mid=story&page=2&document_srl=11007)
이 과정에서 학생 스스로가 자기 공부에 대한 질적 문제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게 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서게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옆에서 관심을 놓지 않고, 어떤 공부 위한 생각의 방식을 계속해서 이야기해나가다 보면, 어느덧 아이도 불현듯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 이렇게 공부하면 되는구나!’
효과적인 공부를 위한 생각의 방법(학습의 퀄리티), 그러한 방식으로의 절대적인 공부 시간(학습의 양), 그리고 바로 그렇게 공부하면 좋은 결과가 따를 것이라는 자신감. 이 삼박자가 맞았을 때, 비로소 아이는 부모님이 시켜서 마지못해 하는 공부, 멍하니 시간 낭비나 하는 공부, 단지 성적을 목적으로 하는 공부가 아닌, 진짜 지식과 지혜를 쌓아가는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다. 성적이 오르는 경험은, 단지 이 과정의 초입에 불과하다.